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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청랑 이상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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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여성의 수기

두 팔이 없고 한쪽 다리가 짧은 가수 레나 마리아의 수기

1968년 9월28일 오전 8시. 산부인과에서 태어난 아기는 팔이 있어야 할 곳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오른쪽 다리는 정상이었지만, 왼쪽 다리는 줄어든 것처럼 오른쪽 다리의 반 밖에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왼발도 몹시 휘어져 있었다. 친척들에게 전할 기쁜 소식은 슬픈 소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아빠는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야만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브릿다 숙모가 병원에 와서 엄마 침대 머리맡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와 같은 장애가 있는 경우, 부모가 직접 아이를 키우기 보다는 시설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사람들은 부모님에게 나를 시설에 맡길 것을 권유했다. 부모님은 이 정도의 중증 장애를 갖고 있는 아기를 집에서 키우기 위해서는 생각지도 못할 엄청난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두 팔이 없어도, 이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이다.”

아빠의 이 한마디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나는 “본래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태어난 극소수의 특이한 그룹에 속해 있다고 생각된다. 

다른 아기들이 손의 사용법을 배워갈 때, 나는 발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엄지발가락에 고무줄로 우유병을 묶어주면, 나는 우유병에 든 오트밀을 혼자서 마실 수 있었다. 

나는 오른 발을 사용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고, 어깨와 턱 사이에 물건을 끼워서 들어올릴 수도 있었다. 

왼발에는 서포터용 보조기를 달고 교정하여, 정상에 가깝게 뻗을 수 있게 되었다. 3살 떼는 처음으로 왼쪽다리용 의족이 생겼다. 나는 7전 8기로 걷은 연습을 하여 마침내는 서포터 없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장밋빛이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는 정말로, 어린 시절에 대해 감사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다.
숲과 호수로 둘러싸인 시골의 대자연 속에 자란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내 인생은 순탄하게 시작되었다. 시골의 좋은 공기와 즐거운 놀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참으로 소중한 부모님이 계셨다. 
                                
부모님은 처음부터 나를 보통아이처럼 키우기로 다짐했다. ‘장애자’로서가 아니라 딸 레나가 우연히 장애를 안고 있다고 여기셨다. 두 분은 ‘이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 주셨다. 이것이 곧 자신감이 되었고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너도 남동생처럼, 하고 싶은 것, 관심이 있는 것은 다 하라고 격려해주셨다.

이처럼 핸디캡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상황에 대해 화가 나거나 서글픈 심정이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할 때 방법이 다를뿐이지, 남과 다른 점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내가 도움을 청하면 금방 뛰어와 도와주는 대신에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덕분에 나는 잘 참는 아이가 되었고, 상황에 맞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실패하거나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울 때눈,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다.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눈물을 흘릴 때도 일부러 피하시지 않으셨다. 덕분에 혼자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는 일에도 견딜 수가 있었다. 뒤돌아보면 항상 엄마와 아빠가 계셨다. 편하고 행복했다.

이웃집에 초대받고 가서 놀다가 내가 넘어진 적이 있다. 큰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쓴살같이 달려와 일으켜 주기를 바랬는데 엄마는 도와주러 오는 대신 말했다.

“저기 울타리까지 기어서 가보세요. 울타리에 기대면 일어날 수 있겠죠?” 

나는 그대로 따랐다. 엄마는 내가 부모님의 곁을 떠나 홀로 독립하여 살게 될 때, 그리고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그럴 때 만약 내가 넘어진다면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고 나를 훈련시키는 것 같았다. 나의 독립심과 자립심을 키우는 것을 중요시 하여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어머니는 물리치료사로 일할 당시에 부모가 아이를 과잉보호해서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나를 과잉보호하지 않고 강하게 키우려고 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교회에 다녔다. 교회에 나가서 아이들과 노래와 게임을 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공작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수예(手藝) 가 아닌 족예(足藝)를 배웠다. 5살 때 십자수로 만든 암탉과 병아리 그림, 2년 후에 재활 훈련사에게 선물한 작은 십자수를 수놓은 식탁보는 지금 생각해도 뿌듯하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방해만 받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몇 시간씩 그림에 집중했다.
                                
나는 오른손이 아닌 오른발잡이로, 펜이나 크레용은 오른쪽 엄지발가락과 집게발가락 사이에 끼우고, 종이는 왼발로 눌렀다. 지금도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나보다도 엄마와 아바가 더 긴장했다. 당연히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를 힐끔힐끔 보기 시작했고, ‘왜 저럴까’하는 이상한 표정들을 지었다. 잠시 후 결심한 듯 몇 명이 말을 걸었고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될 수 있는 한 성실하게 그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들은 내 장애에 익숙해지자,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의 질문에 학생들이 손을 들어 대답할 때면, 나도 다리를 들고 열심히 발을 흔들었다. 물론 정답을 알고 있을 때만!
나에게는 간호도우미가 있었다. 간호도우미는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 도저히 못할 때만 도와주셨는데, 나는 될 수 있으면 무엇이든지 스스로 했다.
“레나가 자기 일을 스스로 하게 놔두세요. 정말 필요할 때 외에는 도와주지 마세요”
엄마와 아빠는 학교관계자와 방과 후 내가 만나게 될 어른들에게 단단히 부탁했다. 

때때로 슬펐던 일은 진정한 친구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학년 때에는 여자 아이들끼리 둘씩 짝을 지어 다니곤했는데 나는 이 ‘짝’이 없었다. 가끔씩 집에 돌아와 울면서 “왜 아무도 나와 짝을 안하는 거야?”하고 엄마에게 떼를 썼다. 그때마다 엄마는 조용히 말했다. “레나에게는 여러 가지 도움이 필요하단다. 같은 반 아이들은 아직 작아서 너를 도울만한 힘이 없어. 그래서 부담이 되는 거야”.

그 대신 나는 많은 친구들과 사귀는 법을 배웠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 한 명에게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서글프기도 했지만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덕택에 친구가 많이 생겼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무서울 게 없었고 장애를 부끄럽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같은 반 아이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놀리기도 했지만 내가 신경을 안 쓰니까 놀려도 재미가 없는지 곧 그만 두곤 했다.

중학교 때는 독일어로 외다리라는 의미인 ‘아인 바인’이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고등학교 때는 레나를 빗대어 ‘레니 마카로니’라고 불렀다. 나는 그냥 재미있는 별명이라고 생각했다. 놀려도 내가 신경을 쓰지 않으니까 장난꾸러기들에게는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 모두 내 장애에 대해 감추려고 안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거나 이것저것 묻는 일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난, 내 존재 가치는 내면에 있는 거지, 외모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나도 부끄러울게 없었다!

오히려 나의 장점을 앞에 내세웠다.  내게 맞지 않는 스포츠도 있었지만, 잘하는 스포츠도 있었다. 수영이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수영교실에 다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연습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수영대회가 있었고, 트르봉과 내가 반 대표로 뽑혔다. 그 날은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다른 5개 반을 제치고 토르봉과 내가 우승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특별히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부모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모보다도 사정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공공기관이나 학교관계자와의 마찰에서 맨 먼저 방어벽이 되어 준 것은 부모님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 성장기에 있어서 늘 당연한 존재였다. 어린 마음에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모님은 미션파 교회에서 봉사하는 분들로, 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존재는 매일매일 마시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언제나 참된 평안을 가져다주는, 조건없이 우리들을 사랑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부모님의 신앙은 내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의 생활은 딱딱한 종교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매일 저녁 함께 기도를 드리고,  찬송가 “ 이 이상의 평안은 없다”를 1절부터 5절까지 모두 불렀지만, “이렇게 기도해” “저렇게 행동해야 돼”라고 강요하신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할 때, 항상 전제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다니던 교회는 스모랜드 지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기독교 신자가 많은 지역에 있는 교회였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신앙은, 내게 더할 수 없는 평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신앙은 항상 잔잔하게 내 생활의 일부분으로 다가왔다. 우리 교회 구역식구들은 내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장애를 안고 있던 나를 그대로,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주었던 분들, 이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주일은 예배를 드렸고 저녁 때는 교회 10대 모임에 참여해 차를 마시면서 교제를 나눴다. 교회 식구들에게 나는 그냥 레나였고,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할 친구는 결코 아니었다.

내가 면허를 취득한느 일은 친구들에 비해 번거로웠다. 우선 내 발에 맞게 개조한 차를 사기 위해 시에다 보조금을 신청했다. 보조금이 나오고 차를 개조한 다음, 비로소 면허를 취득하기 위한 연습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일단 허가가 떨어지자, 일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에데보리에서 열린 1986년 신체장애자 세계 수영 선수권 대회 대회장 중앙 스피커에서 스웨덴 국가가 흘러나왔다. 나를 위한 연주였다. 따뜻하고 기분좋은 날, 금메달 때문일까? 기분까지 상쾌했다. 방금 전, 50미터 배영에서 우승한 것이다. 내가 장애아가 있는 옌세핑구의 스틱 쇼렌더 목사님이 할리윅영법을 배워오셔서 수영을 배우고 싶어하는 장애아들을 위한 수영 교실을 열었을 때 처음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다.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나는 금메달과 동메달을 각각 하나씩 더 목에 걸었다.

우리 교회에서는 배구교실을 열었다. 나는 초보자용 훈련을 받았다, 처음 훈련에서 30분간 계속해서 머리로 공을 퉁기는 연습을 했고 다음날이면 머리가 몹시 아팠다. 하지만 이 훈련 덕분에 공이 날아와도 무섭지 않았고, 헤딩을 해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나는 때때로 우리 팀과 함께 시합에도 나갔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노래와 음악은 나와 함께 했다. 주로 찬송가와 아빠가 좋아하는 으크릿지 보이즈(복음성가와 블루스를 부르는 인기그룹)의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다. 엄마, 아빠를 비롯하여, 친척 모두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르 부르는 것을 좋아해서, 나도 어려서부터 여러 악기를 자연스럽게 접했다. 어릴 때 친척들이 모이는 파키에서 종종 노래를 불렀는데 모두에게 보이도록 의자 위헤 서서 노래를 불렀다.
  
교회와 시청의 음악교실도, 내 음악적 소양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나는 청년 성가대 지휘도 맡았다. 아동성가대에서 청년성가대로 올라가면서 청년성가대의 리더로 지휘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물론 팔로 지휘를 할 수 없었지만, 합창의 지휘는 손으로 지휘봉을 잡는 것보다 연습이 중요했다. 그래서 성가대가 무대에 설 때면 나는 모두 앞에서 노래를 리드하거나, 머리, 입술, 시선, 몸동작으로 지휘를 했다. 

성가대는 점점 실력이 나아졌고, 다른 교회에서도 콘서트를 열어달라는 의뢰가 왔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나 자신도 지방의 교회에서 무대에 서거나, 독자적인 콘서트를 점차 열게 되었다.

스톡홀름 음악대학에 입학한 후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상생활 전부를 혼자 해야만 했다. 집에서는 엄마가 늘  이것저것 챙겨주셨는데, 혼자서 집안일을 모두 해야 한다.
                              
정말 혼자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처음 6개월은 홈헬프 서비스(가정부)를 부탁했다. 실제로 도움이 됐지만  일을 지시하는 게 번거로웠다. 혼자하는 게 차라리 편하고 시간 제약도 안 받았다. 손이 많이 가는 일도 있었지만 할 만 했다.

음악대학에 다니면서 내 신앙을 노래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싶어, 가끔 교회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그리고 음대에서 만나 한스 인게 맥누슨이라는 남성 피아니스트와 함께, 스웨덴 중부 지방에서 공연을 시작했다.

물론 대학에서도 내 신앙을 전하고 싶어서 대학 친구들과 인생에 대해 종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나님과 하나님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나는 스웨덴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크리스천이 많은 지방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을 믿는 지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내 신앙의 뿌리는 내렸다. 일상의 작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는지 내게는 너무나 완벽한 장소였다. 신체 장애자용으로 개조된 아파트는 아니지만, 나에게는 안성마춤이었다. 다른 기능성 장애를 안고 있는 이들은 각각의 장애에 맞는 아파트가 필요한데, 나는 오히려 보통 아파트가 좋았다. 부엌에는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기 위해 싱크대보다 높은 바퀴 달린 의자가 필요했다.

1988년 가을, 스웨덴 국영TV방송에서 나에 관한 다큐멘타리 [목표를 향해]를 만들어서 방영했다. 이 프로그램은  세계 여러나라에 소개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각지도 못했던 레나 마리아가, 세계로 뻗어 나갔다. 마치 멈출 줄 모르는 눈사람처럼. 

많은 시청자들이 ‘존경한다’는 편지를 보내주었다. 그래도 제일 기뻤던 것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는 편지였다. 이렇게 주목을 받으니 콘서트 의뢰도 자연히 늘어났다. 노래를 통해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에 콘서트 횟수가 늘어나는 것이 즐거웠다.

1991년 가을 2개월에 걸쳐 미국교회에서 노래하도록 초대받았다. 54일간 30개 콘서트에서 무려 56회 무대에 섰다. 미국 공연이 끝난 후 스웨덴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너무 지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잠만 푹자고 싶었다. 그러나 미국 공연 때 사온 영어성경을 읽을 때는 기분이 상쾌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뜻한 대로 행하고 진정 옳다고 여겨지는 일을 하라고 격려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이 내 희망이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최선의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나에 대해 두 개의 프로가 방영되었다. 그런데 다큐멘타리에서, 내 신앙과 하나님에 대해 부적절하다는 이유로 방송 전에 ‘컷트’ 당했다. 일본은 TV방송국에서 기본방침이 방송프로 중에는 출연자의 종교관을 다루지 않기로 되어 있다. 그러나 ‘뉴스 스테이션’이라는 프로에서는 진행자가 항상 밝게 여러 가지 일에 도전할 수 있는 비결을 물어보았을 때, 나는 신앙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내가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곧 여러 교회에서 노래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일본에서의 콘서트는 늘 매진이었다. 나는 일본인들이 나로 인해 장애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기독교 신앙을 갖기를 소망해본다.

                             
나같은 장애인도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결혼한다면, 장애인을 배우자로 선택해야 하나? 건강한 남성이 내게 흥미를 가질까? 많은 장애우가 이런 생각을 한다. 난 결혼과 가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이것도 하나님이 이끄신다고 믿었다. 내 인생은 모두 하나님이 이끄시기 때문이다.

내가 비욘을 만난 것은 음악대학 가스펠 합창단 마스터즈 보이스에서 였다. 나는 이 합창단 설립자 중의 한 명이다. 어느날 비욘 클링벨이라는  형제가 테너로 들어오고 싶어했다. 우리는 서로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둘이 만나 점심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욘은 친형제 같았다. 우리는 그저 친구일 뿐이었다. 비욘은 크리스챤이 아니어서 가스펠 합창단인 우리 합창단에 있는 것이 부담스러워 얼마 후에 합창단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하나님은 틀림없이 살아계시다. 예수님 이야기도 사실이다” 라는 것이 믿어졌다고 한다. 이제는 거짓이 아닌 온전한 마음으로 가스펠을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합창단에 복귀했다. 그 해 봄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둘이서 오토바이를 탔고, 음악을 듣거나 이야기를 하고, 콘서트에 가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여전히 친구였다. 비욘과 함께 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몇 달이 지나자 마음 속에서 한가지 물음표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욘과 함께 살면 어떨까? 안돼 안돼 절대 안돼! 분명히 서로가 안맞을거야. 예를 들면 그는 내가 일일이 말을 안해도 필요할 때 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마침내 나는 비욘이 내게 청혼을 한다면 “Yes!"라고 답하리라고 마음 먹었다. 내가 일본으로 공연을 떠나기 전 비욘은 우리 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내가 일본공연을 하면서 나는 일본에서 비욘은 스웨덴에 남아서 그 문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고, 결론이 나오면 크리스마스에 약혼을 하자고 했다. 내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비욘만 결정을 내리면 된다.

일본에서의 3주가 지나갔다. 공항에 마중나온 비욘은 나를 따뜻하게 맞았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에서 비욘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비욘은 “Yes!"라고 대답했다. 그는 인생의 동반자로 나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꼈다. 크리스마스 이브 이틀 전에 우리는 약혼을 했다. 1995년 7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다음날 우리는 오토바이로 유럽ㅇ르 일주하는 신혼여행을 떠났다. 나는 값지고, 가장 친한 친구를 남편으로 맞았다. 그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동역자이다. 난 행복하다. 비욘을 반려자로 맞이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한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이 결혼생활은 환상적인 것은 아니었다. 서로의 결점이 드러나는 것이 결혼생활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결코 문제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았고, 전보다 더욱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배워나갔다.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준다.
“당신에게는 삶의 기쁨이 있습니다. 생활하면서 어떻게 늘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 수 있습니까?”등의 질문을 받는다.
어려운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3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사람은 각자 다른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밝았고, 호기심이 강했다. 나는 어려움보다는 가능성을 생각한다. 무엇이든지 필요 이상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에 대해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용기를 내고,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둘째, 나의 부모님이다. 나와 내 장애에 대한 부모님의 여유로운 태도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중한 의미를 준다. 부모님은 나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든든한 존재였고, 성공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주셨다. 더구난 나를 격려하셨지만 항상 내 장애를 중요시하지는 않으셨다.
            
셋째, 내가 언제나 인생을 밝게 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다. 신앙은 내 생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크리스천으로서 내가 어떤 인간이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지 하나님 앞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가끔 성경 시편 139편을 생각한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음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내가 태아였을 때도 하나님은 곁에 계셨을까? 그렇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내 모습과 형태는 중요하지 않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나님은 나를 좋아하신다. 물론 나도, 이 땅에 왜 이렇게도 많은 고난, 고통, 질병, 장애가 있을까 생각한 적이 있고, 왜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허락하고 계신지 묻고 싶을 때도 있다.

나는 단순하게 답을 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러한 아픔이 우리들 성품을 만들어 가는데 필요하다고 본다. 인간은 누구나 문제없이 인생을 살 수 없다. 인간으로서의 풍요로움이란 고난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내가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아픔이나 고통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이미 하나님께서 주셨고, 내게 주어진 성공이나 실패, 기쁨과 고난이 따르는 내 인생이 누군가에게 무언가 의미를 준다면 그것으로 행복하다.

당연히 나도 하나님에게 장애없는 몸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 어려서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가끔 그렇게 기도한다. 몸이 굳어지는 걸 느끼겠고, 무리를 하면 허리에 통증을 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팔이 있다면 좋겠다. 일하기가 훨씬 쉬워질텐데. 그렇게만 된다면…

하지만 현재의 내 모습 그대로하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건, 역시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여성 조니 에릭슨 타다는 잠수사고 때문에 신체가 마비되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장애와 신앙에 대해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신다면, 분명히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고난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보여 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기쁨과 열정을 주셨다. 그렇게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지만 나는 희망이 있다. 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 고난이 와도 도와줄 수 있는 남편과 가족과 친구가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하지만 제일 큰 기쁨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무엇과도 주님의 사랑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 그것을 한국의 수도인 서울 여행에서 돌아와 노래로 만들었다.

내 마음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당신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바람처럼
당신은 그곳에 계시며
나는 당신 안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너의 친구가 되리라“

진정 사모하는 것은
내가 있는 곳에 
당신이 함께 하시는 것.

당신은 나를 살피시며,
내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나를 위로하시며
함께 하시는 분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실패한 일도
당신은 아십니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심을 
나를 사랑하심을.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

우리 두 명의 기자가 레나의 집을 방문했을 때 레나는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레나는 바퀴가 달린 높은 의자에 앉아 (발가락으로)냄비를 휘젓고 있다.
빨강, 초록,오렌지색 파프리카를 훈제 돼지고기와 함께 크림으로 끓이는 요리였다. 식사 후 우리들은 거실로 옮겨 레나가 구워준 케익을 먹으며 인터뷰를 했다. 또 바나나 케익도 만들었다. 모든 것이 레나의 발로 만든 것이다.

- 레나가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것은 이 책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특히 가족이 늘 함께 행동한 것이 영향을 준 것 같은데.

「부모님이 모두 안정된 가정에서 자란 덕분이예요. 두 분 모두 신앙이 있는 건강한 가정에서 자라나셔서 사물을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세요.
내가 태어났을 때는 놀라셨지만 혼란에 빠지지는 않으셨대요. 내가 태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처음에는 주저했지만 그래도 내게는 가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고,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주셨죠. 아빠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힘을 공급받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부모님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믿으세요. 장애가 있건 없건 똑같다고. 나를 동생 올래와 똑같이 보통 아이들처럼 키우셨고, 그래서 장애아 모임에는 적극적이지 않으셨어요. 엄마는 물리치료사로 일한 경험이 있어서 쓸데없이 안도와주는 게 제일 좋다는 것을 알고 계셨지요」

- 만일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레나의 인생이 바뀌었을까요?

「물론이지요. 인생의 최고의 순간을 맛보고,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 건 모두 하나님의 은혜였어요. 지금까지 걸어 올 수 있었던 용기도 역시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지요. 내가 집을 떠나 독립했을 때, 어려움이 많았어요. 하나님이 안 계셨다면,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냐고, 인생에 대해 좀 더 씁쓸하게 느꼈을 거예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사람은 모두 가치가 있고, 장애를 가져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됐어요. 하나님이 없는 생활은 보다 더 괴롭고, 힘들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요.」

- 하나님을 믿어 혹시 생각이 안이해지지는 않았을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 탓으로 돌린다거나...

「나는 하나님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죠.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세요. 기독교가 좋은 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종교는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나는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도 우리 고난을 이해하시는, 하나님은 내게 절대적인 존재지요.」

- 사람들이 자주 쳐다보나요?
「아이들은 “왜 팔이 없어요?” 하고 물어봐요. 때로는 아이들이 “엄마, 봐, 저 사람 팔이 없어”라고 소리를 질러요. 나는 싱긋 웃어주는데, 엄마는 당황해서 “빨리 가자”라며 아이 팔을 잡아 끌어요. 그것을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그 후 우리들은 몇 번 더 레나를 만나 이야기 학 식사를 함게 즐기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우리 집에서 레나에게 일본 요리를 대접했다. 녹미채 무침을 젓가락을 사용해서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친구가 젓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을 물어오면, 이렇게 먹는거야 하며 자신 있게 가르쳐줘요.’하며 젓가락 쥔 발을 보여준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발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이다. 핸드폰을 할 때는 전화기를 어깨 위에 올리고, 아래 입술로 번호를 누른다. 발로 전화번호부를 들추면서.

자기 스스로 뭐든지 하는 철저한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               *               *
 이상의 글은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 레나 마리아 저, 도서출판 토기장이]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등록일 : 2005-01-29 [23:56] | 조회 : 4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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