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한의 시련과 악몽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하여 - 누리사랑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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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청랑 이상현목사

제목

충격적인 시련을 당했을 때 위안받는 길 2

여러분의 집에 전에 사두었지만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되어 책장의 한쪽 구석에 꽂아두고 읽지 않았던 책 중에는 그러한 책이 있을 겁니다. 내가 편하고 아무런 문제도 없고 ‘등따습고 배부르면’ 그러한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 나와는 종류가 다른 ‘별종’의 인간들로 보입니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끔찍한 시련을 당했거니’라고 생각되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그 책들은 전에 내가 아무런 시련을 당하기 전에 한 번 읽었을 때 약간의 도전은 받았었지만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크나큰 고통과 시련 중에 절망하고 있는 지금 다시 읽어보면 구구절절 가슴에 와 닿고 감동이 되고 큰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줄 수 있습니다. 책장에 그러한 책이 있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서점에 직접가거나 인터넷서점을 통해서 우리보다 더 크나큰 극한의 고통과 시련을 겪었지만 그 모든 고통을 극복한 분들에 관한 책들을 구입해서 읽으면 큰 위안과 도전이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위안받기

인터넷사이트 중에도 여러 가지 종류의 큰 고통과 시련을 당한 분들이 개설한 사이트가 있습니다. 장애우들을 위한 사이트도 있고 그 외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한  분들이 개설한 사이트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이트에 들어가서 올려진 글들을 읽고 위안을 받고 해결책을 찾기 바랍니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을 방문하여 위안받기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혼자 앉아서 신세한탄만 하고 울고 있으면 점점 더 자기연민에 매몰되어서 자기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눈을 밖으로 돌려서 병원이나 장애우 시설이나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회나 소록도 한센씨 마을이나 그 외에 여러 가지로 큰 시련을 겪고 있는 분들이 모인 장소를 방문하면 위안을 받게 됩니다.

현명한 어떤 부모님은 자녀들을 정기적으로 시각장애우들이 다니는 맹인학교나 맹인교회, 병원, 한센씨 환우들이 모여사는 마을 등에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불평불만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위안받기

성경은 모든 종류의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 다 모인 곳입니다.
고난의 백화점인 성경속에서 우리가 당한  시련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한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위안을 받고 고난극복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3. 신앙으로 위안받기.

우리는 극한의 시련과 고통을 당하면 비수나 화살을 외부로 겨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원망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을 원망하며 이를 부드득 갈며 복수를 꿈꾸며 어떤 사람은 빈부격차가 엄청난 우리나라의 자본주의체제를 원망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신(神)’ - 원망할 때는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신’이라고 부릅니다.- 을 원망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제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했던 시절인 사춘기때나 청년기때는 ‘신’에 대해서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사춘기인 십대 청소년기는 ‘폭풍노도의 반항기’이고 청년기는 자기가 제일 잘나고 하늘아래 자기가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안하무인의 교만기’라고 합니다. 저는 반항기인 청소년기 때나 교만기인 청년기 때 믿음이 별로 없어서 하나님을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그 때는 교회에는 다니고 있었지만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않고 ‘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저의 환경과 조건에 대해서 불만이 극에 달할 때는 심지어 “신을 저주한다.”는 말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당시 고난을 당할 때 비수를 하나님께 겨냥했습니다. 하나님의 등 뒤에 비수를 겨누고 신을 원망하고 저주했었습니다. 지금은 극한 고난을 당하면 처음에는 절망도 하고 낙심도 하고 혼자서 몰래 눈물을 흘리며 울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 가서 통곡도 하지만 며칠이나 몇 주 정도 지나면 절망에 빠진 마음을 <동병상련의 원리>와 <하향비교의 원리>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모든 고난과 고통을 이기고 승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반항기인 십대 시절과 교만기인 20대 초반 청년기 때는 ‘동병상련’이고 ‘하향비교’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극심한 시련이 닥치면 무조건 부모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은’ 평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이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무섭고 큰 죄악입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성경 예레미야 2장19절)>

‘하나님을 믿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평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큰 고난이 닥쳐오면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데 그 관심은 하나님께 입에거품을 물고 항의하고 하나님을 극도로 증오하고 저주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하와)가 지었던 하나님에 대한 반역원죄와 같은 크나큰 반역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않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불행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 다 덮어 씌우고 하나님께 극도로 반항하고 저주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품는데 그것이 아담과 이브가 지었던 반역원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반역원죄를 회개하지 않고 평생 가지고 있는 한 지옥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불행스러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하고 증오하고 저주하는 사람들은 만약 그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고 극도로 증오하고 저주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그 하나님을 쳐 죽일 것이 틀림없습니다. 

2천년 전에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난 분이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을 친 무리들이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저주의 마음을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저는 목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반항기 때나 청년기 때도 교회는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증오했는데 만약 그때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제 앞에 나타나셨다면 저는 하나님을 돌로 쳐 죽였을 것입니다. 

만약에 제가 2000년 전에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하나님께 반항하고 저주하던 저의 사춘기나  청년기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면, 그리하여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판결받는 모습을 구경하는 무리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면 저는 그 무리들과 함께 틀림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바라바를 석방하라!”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2000년 전에 로마나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하나님을 증오하고 저주하던 20대 초기에 로마군인이나 유대병정으로 복무하고 있었다면 내가 증오하고 저주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왔다고 자처하는 예수님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그 분의 뺨을 인정사정없이 주먹으로 치고 악감을 품고 인정사정없이 그 분을 십자가에  못박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에 대한 책임이 하나님인 예수님에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의 모든 시련과 고통과 불행의 책임자인 예쑤는 십자가에 죽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내 앞에 서 있는 예수님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얼굴에 손자국이 나도록 무섭게 그의 뺨을 치고 “이놈 너 한 번 죽어봐라”며 악감을 품고 십자가 위에 눕혀놓고 대못을 박아 죽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와같이 하나님께 반항하고 저주까지 한 적이 있는 반역죄인입니다.
저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 반역죄인입니다. 그 반역죄 때문에 지옥형벌을 피할 수 없었던 죄인입니다.

저 뿐만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행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모든 사람들은 2000년 전에 로마나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로마나 이스라엘의 군인이나 여군으로 복무하고 있었다면 저와 같이 예수님을 극도로 증오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을 것입니다. 

반항기 청년기때에는 저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고통과 열등감의 요소와 시련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무조건 ‘신’에게 덤태기로 덮어 씌우고 ‘신’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책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니체의 책들을 항상 머리맡에 두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비해서 믿음이 많이 자란 지금은 모든 고통과 고난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있습니다.  
 
제 2장 시련과 고통의 의미

우리가 극심한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시련을 극복할 수도 있고 좌절하고 낙심하여 자포자기하고 실패한 인생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저주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결코 그 고통과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절망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저희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큰 고난을 당하면 언제나 하는 말이 “내가 복이 없어서 이런 연금(고통, 고난, 시련을 의미하는 전라도 말)을 보제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니고 설교시간에 고난에 대해서 수없이 들은 할머니성도님 중에도 가정에 큰 사건이 터져서 ‘심방’(신도들의 집에 찾아가서 예배드리고 기도해주고 위로해주는 일)을 가면 눈물을 흘리며 “목사님, 나가 복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했소야”라고 합니다.

‘내가 복이 없어서 이런 일을 당했다.’는 생각은 복이 없어서 이런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커다란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 그것을 내가 복이 없어서 받은 저주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그 고난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갈림길이 갈라지게 됩니다.

서울에서 남쪽으로 오다보면 ‘회덕분기점’이 있습니다. 회덕 분기점에서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갈라집니다. 갈라지는 시점은 거리가 얼마되지 않고 가깝습니다. 갈림길이 갈라지는 시점은 1센티미터 5센티미터 1미터 2미터 3미터 이렇게 조금씩 점점 더 벌어집니다. 1미터 2미터 3미터는 걸어서 몇발자국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부산과 목포라는 천리 먼길로 달라지게 됩니다.

‘작은 생각의 분기점’이 인생의 실패와 성공의 갈림길을 갈라 놓습니다.
‘작은 생각의 분기점’이 시련 앞에 좌절하고 자포자기 하게 하기도 하고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기도 합니다.

인생에서 승리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 -저는 성공자를 돈, 권력, 인기, 명성을 얻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가고 자녀를 올바르고 성실하게 교육시키는 사람을 성공자로 여깁니다 - 과  한겨울에도 용산역 화장실의 스팀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선잠을 자고 있는 알콜중독의 낙오자들의 차이는 처음부터 컸던 것이 아니고 ‘고난과 시련에 대한 작은 생각’의 차이가 엄청난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이란 무엇인가.

저는 여러분들이 인생의 고통과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고통과 고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조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고통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가장 가치있는 일이다.

고통에 대해서 가장 많은 연구를 한 사람은 아마 현대 기독교의 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의 한 명인 필립 얀시일 것입니다. 그의 고통에 대한 인식은 폴 브랜드박사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폴 브랜드박사는 한센환우(나환자)치료의 최고권위자중의 한 명으로서 의학계에서 권위있는 앨버트 라스카 상을 수상했으며 엘리자베드 영국여왕으로부터 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 으로 지명되기도 한 분입니다. 폴 브랜드박사는 루이지애나주 카빌레에 있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한센환우치료기관에 근무하는 의사입니다.

 필립 얀시의 저서인 <하나님 내마음이 상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엠마오 역간)>라는 책에서 고통에 대한 견해를 요약해 봅니다. 다이제스트식으로 인용하기 위해서 인용 페이지는 쓰지 않겠습니다 
                            *   *   *

            [하나님 내마음이 상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

내가 루이지애나주 카빌레에 사는 폴 브랜드박사를 만났을 때 그가 전해준 신체의 고통전달 조직의 놀라운 유효성은 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추호의 주저함 없이 브랜드박사는 “고통을 만드신 것으로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마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일일 것입니다. 매우 아름다운 일이지요.”라고 말한다. 그에게는 그러한 판단을 내릴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그는 신경조직에 침입하여 그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한센씨병(나병)에 관한 탁월한 전문가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브랜드 박사가 고통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경외심은, 인공적으로 고통을 감지 전달하는 조직을 고안하는 연구를 하고 난 뒤에 오히려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는 인공고통감지 장치에 대한 연구를 전자공학,생체공학,생화학분야의 전문가 세 명과 함께 시작하였다. 5년동안 브랜드박사와 그의 연구원들은 전심전력을 다해 연구하였다.

그러나 브랜드박사는 현재의 과학기술의 엄청난 지원을 받는 과학자들이 어떠한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그들이 만든 고통감지기는 선천적으로 고통을 감지하는 신경세포와 같은 것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인공적인 고통감지기의 수명도 길지 않아서 몇 백번 사용하고 나면 금속의 약화나 마모로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여졌다. 

그러한 연구가 있고 난 뒤 (즉, 인간의 과학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체고통감지조직과 같은 것을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알고 난 뒤) 브랜드박사와 그의 동료들은 (하나님이 만드신)인간의 ‘고통인지조직’이 놀랍도록 정교하다는 것에 대해 더욱 더 찬탄하게 되었다.

피부의 표면은 고통을 감지할 수 있는 수백개의 장치로 뒤덮여 있다. 그리고 인체의  내부기관들은 고통을 피부로 전달하는 고통전달 보조체제를 통해서 고통을 알리게 된다. 고통을 감지하는 세포가 필요한 양만큼 정확하게 분포되어 있다고 하는 것, 고통을 전달하는 보조체계가 존재한다는 것 등의 사실은 고통의 전달 조직망이 결코 우연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우스꽝스러운 실수이거나 우연히 갖다붙이게 된 첨가물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처음부터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계획된 멋진 기획물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인체에 아주 적합하게 고안되었다. 

피부나 내부기관에 고통감지장치가 없고 그리하여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생명은 위험으로 가득차게 된다. 스포츠를 즐길 수도 없다. 왜냐하면 축구를 하다가 상대선수가 실수로 다리뼈를 차서 다쳐도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계속 축구를 하다가 다리뼈가 다 어그러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다면 잠을 자다가 집에 불이나서 온 몸이 다 타더라도 잠을 깨지 않을 수 있다.  고통이 없이 몸이 불타기 때문에 잠도 깨지 않고 불타서 죽을 수 밖에 없다. 

폴 브랜드박사는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통을 만드신 하나님께 그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고통은 손가락이 스토브에 닿았을 때 황급히 손을 떼게 할 만큼 충분히 불쾌한 성질을 가진다. 그러나 이 같은 특징이 우리를 완전한 파괴의 길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경계 신호가 인체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즉 고통조직이 없다면 우리는 뜨거운 난로에 손을 넣고도 아픈 줄도 모르고 손이 뜨거운 불에 타서 다 녹아져도 모를 것이다.)

우리가 질병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할 때 이를 악물고 고통을 증오하며 극심한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할 것이다.

그러나 질병으로 극심한 육체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고통조직이란 우리 몸을 보호하는 기능을 매일 매일 성실하게 이행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고통이란 우리 몸을 위협하는 온갖 것들이 널려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체가 생존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고안된 경계신호장치이다.

고통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스꽝스런 실수가 아니다. 이것은 그 분의 선물이다. 고통이 없다면 우리의 생명은 감염과 몸이 썩어가는 것을 피할 길이 없어진다. 나는 모든 고통이 유효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때때로 고통은 우리를 격분시키고 삶을 비참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고통은 중증의 질병에 대한 강력한 경계신호일 가능성이 많다. ‘고통은 축복’이라는 말은 고통과 관련된 많은 문제들을 단순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관점으로 고통과 고난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출발점이다.

고통의 아픔이 주었던 감정적인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고통이 가지고 있는 귀하고 고유한 가치를 너무나도 쉽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나조차도 팔은 부러지고 팔의 떨림으로 멍하니 있을 때는 대개 고통에 대하여 감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고통은 나의 몸이 즉각적으로 위험을 인식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상처 주위에 감염을 방지하는 방어기제들의 작동이 시작되고 나의 몸은 그 상처 때문에 일어날 더 큰 질병의 고통으로부터 보호받게 된다.  

브랜드 박사는 고통감지 체계의 결함으로 인해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한센병(나병)환우들과 함께 생의 대부분을 보낸 인물이다. “한센병”이란 단어는 무엇을 먼저 연상시키는가? 손가락이 다 없어진 뭉둥한 손, 발가락이 다 없어진 뭉둥한 발, 다 빠져버리고 없어진 눈썹, 문드러진 코, 사라진 귀 등이다. 

한센병은 가장 잔혹한 병중에 하나이다. 그 병의 잔혹성은 손, 발, 코, 귀, 눈 등의 부분에서 고통감지기능을 담당하는 조직들을 마비시켜서 일종의 마취상태에 있는 것같은 증세를 일으킨다. 사실 그것이 왜 그리 큰 문제일까 하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대부분의 병들이 큰 고통을 가져오기 때문에 병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한센씨병은 전혀 고통이 없는 이상한 병이다. 그렇다면 고통이 없는 병이 왜 그렇게 끔찍하고 무서운 병일까? 그것은 한센씨병의 마비적인 증상이 온 몸을 부패하게 하여 무시무시하게 파괴하기 때문이다.

한센병환자들은 밤에 잠을 자는 사이에 쥐가 와서 발을 다 물어뜯어도 전혀 그것을 모르고 잠을 잔다. 이튿날 아침에 발가락이 없어진 것을 눈으로 보고야 발가락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된다.

한센환우 중에 시각장애자(맹인)가 많은 이유는 눈의 기능 중에 외부의 먼지 티끌 흙등의 자극(고통)을 알려주는 고통감지기관이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눈은 먼지, 흙, 티끌등이 들어가면 고통감지기관이 작동하여 눈꺼풀을 내려서 눈물로 씻어주어야 하는데 먼지, 티끌의 자극(고통)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되므로 눈꺼풀이 깜박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그러므로 눈동자는 점점 말라붙게 되어 실명을 하고 마는 것이다.

눈이 외부의 먼지나 티끌이 주는 자극에 대한 반응(먼지나 티끌이 들어올 때 느끼는 고통)은 눈꺼풀을 자주 깜박이게 해주고 실명을 예방해준다. 그러나 눈이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하지 않으면(즉 먼지나 티끌이 들어와도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 눈꺼풀은 자주 깜박이지 않아서 눈동자가 점점 말라서 끝내는 실명하게 되는 것이다. 먼지 티끌등의 자극에 대한 눈의 반응(고통의 느낌)은 실명을 방지하는 위대한 축복이다.
 
브랜드 박사를 방문하여 내가(필립 얀시)가 제일 먼저 깨달은 것은 고통이 없는 삶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히 인간을 파괴시키는가 하는 것이었다.  

일평생 수많은 한센환우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신체의 고통감지조직의 마비로 손가락, 발가락, 눈, 귀. 코. 팔, 다리가 썩어들어가도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현상들을 목격한 브랜드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통을 우리의 활동을 제한하는 커다란 훼방꾼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나는 고통이 자유의 위대한 시혜자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 고통감지기관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모릅니다. 길을 가다가 신발속에 있는 발가락이 썩어서 떨어져 나가도 모르고 계속 걷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고통이라는 선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세계에 산재하는 한센환우들의 집단(소록도같은 한센환우촌등)은 고통이 없어서 파멸의 길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집단이다.  

등록일 : 2002-01-19 [12:31] | 조회 : 9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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