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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청랑 이상현목사

제목

<빛과 소금>지에 실렸던 운영자의 목회 이야기

(빛과 소금 2001년 8월 15일자 )

낙도 선교 현장/ 완도 망석리교회 이상현 목사, 박금숙 사모
 
굳게 걸린 시골집 빗장 풀기
 
부침개 들고 찾아온 사모를 문전 박대한 사람들이 변화되고 …

“시골 교회는 심장이다!” 허물어 가는 빈집의 방 한 칸을 색종이로 꾸며 만든 예배당, 일명 ‘오두막집 교회’ 구석에 무릎 꿇고 앉아 끙끙대고 있던 이 목사에게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다. 기도도 나오지 않고 ‘정말,시골 목회 못하겠네. 전도해서 죽도록 키워 놓으면 도시 교회로 가 버리니 이거 힘들어서 하겠나’ 하는 생각만 맴돌고 있을 때였다. 

힘들게 전도해서 겨우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제 새벽기도를 열심히 나올 정도가 된 이후금 성도가 대전 사는 아들집으로 갑자기 이사를 가 버렸다. 더더욱 속상한 것은 열심파 초등학생이었던 두 손녀들도 같이 가는 바람에 주일학교까지 썰렁해진 것이다. 교회를 성실하게 섬겨 주던 희순과 은순 자매도 직장 때문에 광주로 나가버렸다. 

 이렇게 양육되어 기둥 역할을 하게 된 사람들이 떠날 때마다 망석리교회는 한차례 홍역을 앓고, 이상현(43세) 목사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누구에게도 내색은 못하지만, 솔직히 그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당장 보따리 싸서 떠나자”는 소리가 나온다. 
  그날도 그런 일로 낙심하여 ‘로뎀나무 아래 엘리야’마냥 홀로 앉아 있는데 성령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시골 교회가 심장이라니요? 무슨 의미입니까?” 되묻는 이 목사에게 성령님은 고린도전서 12장 12절 이하에 나오는 지체의 비유를 생각나게 하셨다. 그러면서 온몸에 피를 공급해 주는 심장처럼 시골 교회는 도시 교회에 성도들을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다.
 
  그 후부터는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가도 불평하는 마음이 아니라 기꺼이 보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많을 때는 중학생 이상 성도가 30여 명이나 되던 교회가 이렇게 한둘씩 떠나면서 지금은 조금만 남았다.
 
  그러나 처음 이곳에서 예배드리던 때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가. 95년 2월, 이 목사가 망석리 마을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만 해도 280여 명 마을 주민 가운데 단 2명만이 크리스천이었다. 전도사 한 명이 마을 빈집에 혼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고, 예배는 읍내 교회에 다니던 김말래 할머니네 방 한 칸을 빌려 드리고 있었다. 

  “김말래 할머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 주신 일꾼이에요. 여름에 온 낙도선교 팀에게 집을 내줬다고 집을 태워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기도 했거든요. 그래도 흔들림 없이 기도하면서 잘 견뎌 주셨지요.” 서울에서 온 손님 저녁상 차리느라, 칭얼대는 둘째 은비 어르느라 바쁘던 박금숙(40세) 사모가 말수 적은 남편 대신 설명한다. 

  이 목사가 마을에 와서 처음 부딪쳤던 가장 높고 단단한 벽은, 마을 종교처럼 정착되어 있던 유교 사상. 완도군 전체의 유교 지도자(전교)를 지냈던 고(故) 홍성철 전교가 바로 이 마을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지도자였기 때문에 마을은 전적으로 유교 영향권 아래 있었다. 홍성철 전교는 대통령상도 받고 국가나 사회에서 주는 상을 30여 차례나 받고 살아생전에 마을 입구에 공덕비가 세워질 정도이니 이 작은 마을에서 얼마나 영향력이 크겠는가?
그의 말이 곧 마을의 법이었다. 그처럼 막강한 카리스마적 영향력을 지닌 홍성철전교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교회는 못들어온다"고 선언했으니 개척하러 왔던 목회자들이 쫓겨나지 않고 견딜 수가 없었다.

 이 목사가 들어올 때도 마을 전체 주민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마을공회를 열어 교회를 쫓아낼려고 했다.그렇게 높은 벽을 쌓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지금은 ‘교회 안 짓느냐’는 질문을 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 목사와 박 사모가 흘린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망석리에서의 빈집 생활 

가난한 농촌 목사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너무나 어렵게 자란 이 목사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에 가득 차 있던 청년이었다. 정직하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지독한 가난 때문에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분을 찬양할 수 없었던 것. 청년의 인생 목적은 오직 돈을 많이 버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시절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하면서 완전히 거듭났고 총신대 신대원에 갔다. 그래도 농촌 목사만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서울 강남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고자 열심히 장소를 물색했다. 

  “아버님을 보면서 농촌 목회에 한이 맺혔어요. 목사가 되더라도 대도시에서 목회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었는데….” 그러나 결국 “낙도로 가라!”는 부르심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르심을 확인하고 순종하기로 했지만 그는 ‘시간적 여유’를 달라고 기도했다. 37세 노총각, 6남매의 장남, 무일푼의 가난뱅이 전도사. 이 3가지 악조건에 낙도 목회까지 덜컥 시작해 버리면 장가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막무가내셨다. 그가 더 이상 지체하고 미룰 수 없도록 상황과 마음을 이끌어 가셨다. 결국 결혼 문제도 하나님께 맡기고 완도 망석리로 향했다. 처음에는 잘 곳이 없어서 주말에만 내려가 아이들과 할머니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다. 

  박금숙 사모와는 망석리에 내려간 지 1년 만에 만났다. “섬에 선교하러 내려왔던 분의 소개로 만났는데  5~6개월 후에 결혼했습니다. 맡기고 순종하니까 예비하시는 것을 확실히 체험한 것이죠.” “완도에서 섬 목회한다는 것만 알고 만났어요. 저도 사회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세련된 매너 등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 분은 너무 촌스럽더라고요. 하지만 첫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아무것도 못하지만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결혼 전, 이 목사가 살고 있던 망석리 집에 와 본 사모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곧 쓰러질 듯한 폐가인데다가 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우물을 이용해야 했고, 연탄 아궁이는 자주 고장나 추운 겨울에도 냉방에서 자야 했던 것. 게다가 이 목사의 두 켤레 구두는 밑창이 다 닳아 있었고 옷이라곤 선물 받은 와이셔츠 한 벌뿐이었다.

  “그러니 신혼집이라고 뭐 달랐겠어요? 역시 몇 년 동안 비워 놓은 집이었는데 부엌이나 화장실 모두 옛날 재래식이고, 방은 장롱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천장이 낮고 ….” 깐깐한 성격에 도시에서만 자란 박 사모가 이런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의 걱정이 컸었다. 그러나 박 사모는 오히려 남편보다 빨리 섬 생활에 적응했다. 하나님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는 마음 때문이란다. 

  망석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박 사모는 부침개를 해 들고 마을의 한 어르신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누구요?”하면서 문을 열려고 하다가 박 사모인 줄 알자 얼른 닫으며 “가쇼!”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었다. 얼마나 속상하던지….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제가 원래 어르신들한테 친근감 있게 잘해요. 여기 와서는 할머니건 아저씨건 누구한테나 친한 척 하고 인사하고 그랬어요. 아마 속으로 ‘나랑 언제부터 친했다고 저러나’ 생각한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다가가던 박 사모는 또 다른 일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반찬 서너 가지 만들어서 혼자 살고 있는 이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 아침 일찍 일어나 장을 보고 이것저것 만들다 보면 정오, 그때부터 반찬 들고 일일이 찾아다니다 보면 시간이 늦어질 때도 많았다. 한두 명의 성도가 도와주거나 아이들이 반찬을 날라 주면 훨씬 수월했지만 그건 가끔 있는 일이었고, 대부분 혼자 해야 했다. “하다가 그만 두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꾸준히 하려고 노력하는데, 둘째가 태어나면서부터는 혼자 못하겠어요.”

  아직도 외지인이라 부르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주치면 인사를 나눈다. 눈이 나빠서 사람을 잘 못 알아보는 할머니들이 “누구요?” 물었을 때 “교회에요” 대답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망석리에서는 이 목사와 박 사모 자체가 교회인 것이다. 

교회가 있기에 마을이 변한다 

이 목사의 일과는 아침 식사 후 전도하기 위해 마을로 나서면서부터 시작된다. 망석리와 옆 마을인 도암리·석장리를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절망스러울 때가 많다. “원래 전도하면 기쁨이 넘치고 신이 나잖아요. 그런데 매일 만나는 분들에게 매일 전해도 변화가 없으니까 굉장히 낙심돼요. 사실 처음 망석리 올 때는 6개월 만에 마을을 복음화시키겠다는 야무진 포부에 차 있었는데, 막상 살아 보니 그게 아니더군요.” 

  전도를 하면 60~70%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한다. 그러나 이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삶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입으로만 영접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동안 또 시간만 흐르고… 이 목사는 때로 너무 지친다. 그럴 때면 바닷가로 나가 하나님께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이만큼 했으면 교회에 나올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럴 때마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 말씀을 통해 새 힘을 주시고 일으켜 주셨다. 

  이 목사가 들어와 마을에 기도 소리와 찬송 소리가 울린 지 6년. 주정뱅이나 노름하는 사람들이 많던 마을, 낡은 집들이 많아 빈촌으로 보이던 마을, 상수도가 들어오지 않아 물이 귀하던 마을은 상수도가 들어오고 마을 환경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해 지금은 방문객들이 ‘부자 마을 아니냐’고 묻는 정도가 되었다. 3년 전에 상수도도 설비되었고 술 먹고 싸우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줄었다. 이것이 바로 마을에 교회가 있고 없고의 차이라고 이 목사는 말한다. 이렇게 바뀐 마을에 대해 안 믿는 사람들은 인간의 공로나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사실은 새벽마다 교회에서 마을을 축복하는 기도가 드려지기 때문이란다. 

  교회가 뭔지 몰라 예배당에 신발 신고 들어가 마구 어지러뜨리는 아이들, 목사가 뭔지 몰라 “자네 각시는 어디 두고 혼자 다니나”하며 술 한 잔을 권하는 사람들. 이 목사는 오늘도 이들과의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기 위해 마을로 향한다. 여전히 ‘외지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 외롭지만, 주님이 허락하신 땅이기에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에 간절한 기도를 담는다. 

김현정기자  hyeon@tyrannus.co.k

 

등록일 : 2003-07-03 [22:56] | 조회 : 6433 | 다운 :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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