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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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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감정을 회개합시다.

(좀 긴 글이므로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끊어서 읽기 바랍니다.) 


                                            지역감정을 회개 합시다. 
                
                                                                               글. 청랑 이상현 목사
                                                                                    (완도한빛교회)
                                                         
                                      
제가 어느 날 기도원에 금식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서 나라와 민족의 앞날이 걱정되고, 굶어죽어가는 북한동포들이 너무 불쌍하고 걱정되어서 대통령과 야당대표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여당과 야당국회의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북의 자유민주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남북의 자유민주평화통일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 도중에 성령님께서 "얘야,남북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지역감정회개를 위해서 기도해라. 한국인들의 지역감정 때문에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는 줄 아니? 세상사람들의 지역감정보다 그리스도인들의 지역감정이 나를 슬프게 하고 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단다. 지역감정 때문에 교단이 갈라지는 일이 생기고 한국교회에 지역감정이 있는 한 한국교회에 제 2 의 부흥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역감정이 있는 한 남북 통일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리스도인의 지역감정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나의 심정을 한국교회에 전하라.  그리스도인들이 지역감정을 회개해야 하나님이 남북이 통일을 허락한다고 전하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금식기도를 마치고 하산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지역감정회개에 대한 이 글을 쓰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지역감정에 대해서 설교할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지역감정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도록 몇가지 조건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저는 경북 의성 출신입니다.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인 16세까지 목회자이신 아버님을 따라서 의성과 문경과 약목에서 살다가, 대구에서 대구고등학교를 다니고 경북대학교를 다녀서 대구 경북인 TK에서 골고루 살아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형적인 TK 입니다. 
그리고 1995년도부터 지금까지 낙도선교회에서 파송된 낙도선교사로서 전남 완도의 무교회 마을이었던 90여 가구의 망석리에서 목회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의 고향이 전남 순천 주암면 광천리라는 곳입니다. 주암댐 바로 아래동네입니다. 또한 저의 두 딸은 완도 망석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수씨가 광주가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저에게 지역감정에 대해서 설교할 수 있는 조건과 환경들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한국인들의 지역감정은 심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기독교인들의 지역감정은 별로 문제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지역감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역감정을 단순한 중립적 감정이 아니라 죄악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이 설교는 비호남인들만 들어야 할 설교이거나, 호남인들만 들어야 할 설교가 아니라, 비호남인들과 호남인들이 같이 들어야 할 설교입니다.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비호남인들의 지역감정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죄의 문제이고, 호남인들의 지역감정도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호남인들은 지역감정의 피해자입니다. 그래서 호남인들은 자신들의 지역감정문제를 정당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감정의 피해자이므로 영남사람이나 비호남사람들을 비판해도 아무런 잘못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라는 것이 지역감정이라는 죄의 문제에서 자유롭게 해주지는 못합니다. 피해자라는 것이 지역감정의 죄를 정당화해주거나 회개하지 않고도 감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역감정의 역사적 뿌리.

저는  먼저 지역감정의 역사적 뿌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한국인의 지역감정을 영호남의 갈등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단순히 영호남의 갈등이라고 하면 오히려 문제의 해결이 쉽습니다. 영남과 호남의 갈등 뿐이라면 지역감정의 당사자는 영남과 호남 두 지역사람들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호남인에 대한 비호남인의 차별과 기피입니다. 비호남인들에 의한 호남인 따돌리기, 요즘말로 하면 비호남인들에 의한 호남인 왕따 현상입니다. 일본말로 하면 호남인 이지메 현상입니다. 어떤 비호남인은 선거철만 되면 호남인들이 똘똘 뭉치는 것을 보고 ‘꼴보기 싫으니 호남을 따로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한국인의 지역감정의 뿌리, 즉 호남기피의 뿌리, 호남왕따의 역사적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호남인 왕따’라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서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호남인 왕따’현상이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의 개발 편중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호남인 이지메 현상은 박정희 시대 이 전부터 있었습니다. 

박정희 시대 이전에도 서울에서는 비호남인들이 호남인들에게 방을 세로 주지 않으려고 하거나, 비호남인들이 호남인 학생들을 하숙생으로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거나, 비호남인 사장들이 호남인들을 고용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즉, 박정희 시대 이전부터 비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을 왕따시키고 있었습니다. 박정희 시대부터는 비호남인들의 호남인 기피현상보다는 영호남 갈등이 시작된 시기입니다. 그것이 전두환 노태우 씨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호남인들을 살상한 행위 때문에 영호남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영호남 갈등은 박정희 시대에 시작되었고, 전두환 시대에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호남인들에 대한 비호남인들의 기피라는 지역감정은 박정희 시대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국사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은 삼국시대부터 호남인 기피현상이 있어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역사학자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남긴 훈요십조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고려사> 태조 26년 4월 조에 보면, 고려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車峴) 이남과 금강(錦江) 아래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차령산맥 이남과 금강 이남의 호남인들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의 근거는 호남이 배산역수(背山逆水·임금이 있는 반대쪽으로 산맥과 물이 달린다)의 땅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왕건이 남긴 이 유언은 제도적 차별도 정당화했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적 차원에서 호남인들에 대한 편견을 유발했습니다.

풍토적으로 볼 때 백제의 유산을 받아 이지적이고 학문을 좋아하며 정감적이었던 호남인들은 훈요십조로 인해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배산역수의 논리에는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의혹이 있습니다.
여러 문헌으로 미루어 볼 때 왕건이 정말로 훈요를 남겼는지, 그것이 꼭 10조였는지, 그리고 그 8조에 호남 기피의 조항이 들어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훈요십조가 의심을 받는 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태조 편에 훈요십조가 기재된 경위에 의혹이 있습니다.
문헌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사" 태조 편이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 시대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습니다.

"고려사" 열전 최승노·제안 조에 보면 이때 최제안이라는 인물이 최항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습니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 구신(舊臣)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실의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개인집에 보관되어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둘째, 왕건이 그러한 유언을 남길 만큼 백제인들을 미워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고려사"를 살펴 볼 때, 왕건이 이 훈요 8조대로 호남인들을 관직에서 배제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없습니다.
왕건이 후백제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17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을 보내며 고초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백제를 미워했다는 논리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왕건이 견훤과의 원한 관계로 인해 호남을 미워했을 개연성도 있다고는 하지만 실제 정황을 보면 그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청주 일대의 저항 세력이었지 지금의 호남 세력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호남인들 중에는 당시 중앙 정부에 입신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컨대 왕건이 평생 사표로 삼았던 도선국사와 살아서는 상주국(上柱國)이오 죽어서는 태사(太師)가 된 최지몽(崔知夢)은 영암 출신이었고, 왕건의 부인이자 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출신이었습니다.

또 왕건과 말년을 함께 산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는 승주 태생의 순천 박씨로 견훤의 외손녀들이었으며, 고려의 창업 과정에 왕건을 대신해 죽은 개국공신 신숭겸은 곡성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훈요십조를 받았다는 박술희는 후백제의 당진사람이었는데 호남인을 피하라는 말을 굳이 호남 사람인 그를 불러 전했을 리가 없습니다. 

셋째, 고려 왕실이 그토록 호남을 기피했다면 거란의 침입 당시에 현종이 굳이 호남으로 피난했다는 사실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즉, "고려사"(현종 2년 정월 기해 조)에 의하면 거란의 침입 당시 현종이 전주에 7일 동안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왕건의 훈요십조가 사실이고 또 후손에 대한 훈요십조의 영향력이 그토록 강력했다면 왕은 영남이나 강원도로 피난했어야 옳았지 호남으로 피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훈요십조는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훈요십조’가 조작되었든 진실이든 간에, 그리고 “호남인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왕건의 유언이 사실이든 조작이든 간에 왕건의 유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처럼 훈요십조는 후세의 우리 백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역사적으로  비호남인들의 호남인 기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훈요십조의 호남 기피를 합리화한 배산역수론을 가장 구체적으로 쓴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였습니다.

그는 8도의 풍물과 인심을 기록하면서 유독 전라도에 대해서만은 부정적이었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호남은 ‘반역과 요사(妖邪)와 미신과 재앙의 땅’이었습니다.
그는 "호남은 땅이 멀고 풍속이 더러워 가히 사람 살 곳이 못되며... 사람들 또한 교활하여 도리가 아닌 것을 위해 쉽게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희한한 일은 이중환이 8도지를 쓰면서 천하를 모두 돌아보았지만 유독 호남 땅은 밟아보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행이라면 구경거리 많은 호남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이며, 설령 여행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외갓집이 나주였기 때문에 한번쯤은 가 보았음직 한데 그는 끝내 호남에 발을 들여놓지도 않고 그런 글을 썼습니다. 

이중환이 호남 땅에 발도 들여놓지 않은 이유는, 그가 병조정랑에 있으면서 목호룡 사건에 연루되어 1년에 네 번씩이나 악형을 당한 후 유배되는데 이것이 광산(광주) 김씨의 고발에 의한 것이어서 그의 가슴에 평생 한으로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광산(광주)을 기반으로 하는 노론, 구체적으로는 광산 김씨와 그 문도들의 박해를 받아 죽음 직전에 감형되어 3년 동안 원수의 땅에서 귀양살이를 했고 그후 20년 동안 좌절 속에 당쟁과 광산의 노론을 저주하며 <택리지>를 썼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중환은 호남인들에 의해 고발되어 사형 직전에 감형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본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호남인들을 저주하고 미워하여 택리지를 쓰면서 그 감정을 남김없이 표현한 것입니다.

이중환 뿐 아니라 정도전에 의하면 호남인의 기질을 풍전세류(風前細柳)로 비아냥거렸고, 정도령의 출현을 예언했다는 정감록은 호남에 대한 저주로 가득차 있습니다.
 
호남기피현상의 역사적 요인 중에 삼국 시대의 전쟁과 훈요십조의 강력한 영향력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있습니다.

호남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비옥한 천혜의 곡창지대 입니다. 옛날에는 곡창지대의 사람들은 배부르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곡창지대의 사람들이 항상 풍요롭게 살아온 만은 아닙니다. 곡창지대의 주민들이 폭군같은 악한 임금이나 악한 탐관오리들을 만나면 피땀흘려 수고하여 농사를 지은 곡식을 무상으로 수탈당합니다. 
피땀흘려 농사지은 곡식을 수탈당한 곡창지대 사람들은 권력자들에 대해 점점 반항적으로 변모해 갑니다. 

만경평야의 기름진 땅은 이곳에 부임하는 방백수령들의 물욕을 자극했고 호남인들은 곡창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수탈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풍년에 배고픈 민생이었습니다. 그래서 곡창에 살면서 가렴주구 당하여 배가 고팠던 호남인들은 몇 건의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호남에서 있었던 몇건의 민란은 호남을 ‘반역의 땅’으로 보려는 비뚤어진 시각이 형성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런 현상은 특히 관변측 기록에 심하게 나타났습니다. 

정여립의 난과 갑오농민혁명(1894)은 가치박탈에 의해 제기된 민란으로서 호남에 대한 편견을 가속화시킨 대표적인 예에 속합니다. 

이들 민란은 ‘호남은 반역의 땅’이라는 논리를 강화시켜 주는 데 이용되었고 
유교적 근왕사상에 의해 부당하게 비난받았습니다. 
비호남인들은 호남지역에서 일어난 몇 건의 민란을 목격하고 ‘호남인들은 반역의 무리들’ 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수탈과 박해는 인구이동을 유발합니다. 

인구비로 볼때 도시로 향하는 인구이동은 호남인이 가장 많았으며 그것은 도피의 성격이 짙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도시의 빈민층이 되어 타지역인의 눈에 비친 호남인의 심성은 나쁜 인상은 주었을 개연성이 있으며 이것이 호남기피를 가속화시켰습니다. 

그러면 정말 호남이 반역의 땅일까요?
호남을 반역의 땅이라는 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역사적 예를 들어봅시다.
송상현, 김제민, 김덕령, 정충신, 고경명, 김천일, 논개 등의 임진왜란 공신들이 이곳 호남 출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은 왜란 전에 정읍의 현감을 지낸 적이 있어 이곳 주민들은 ‘충절의 고장’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란 이후의 논공행상에서 호남인들은 정여립의 잔당이라 하여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송상현, 김제민, 김덕령, 정충신, 고경명, 김천일, 논개를 배출한 호남은 반역의 땅이 아니라 애국충절의 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호남인 차별에 대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호남인들의 성향에 대하여

비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의 성격이나 성향을 이유로 호남인들을 싫어합니다.

훈요십조나 택리지 같은 책을 읽은 많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사람들은 호남인들의 시각에 부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와서 호남인들에 대한 비호남인들의 편견이 되고 말았습니다. 비호남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호남인들은 끝이 안좋다.> <전라도 깽깽이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기숙사에 있을 때 비호남인 전도사님들만 모여서 전라도 사람들을 비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대원생 중에 고향이 전라도이면서 억양을 서울말을 쓰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낙도선교회의 단기사역시 여러차례 전남의 섬으로 다니며, 호남인들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에게 개인적으로 ‘전도사님 난 고향이 전라도요.’라며 특A급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기숙사에서 같은 학년의 경우에는 고향에 대해서 거의 다 알지만 다른 학년의 경우 잘 모릅니다. 저에게 고향이 전라도라고 털어놓은 분은 저의 선배였습니다.

전라도 사람 중에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한 부류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임을 드러내놓고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있고, 한 부류는 자신이 전라도 사람임을 숨기고 말씨도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성격이 외향적이거나 전라도 사람의 차별을 받아 보지 않았거나 심한 차별을 받았지만 더욱 더 오기로 전라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사람입니다. 

 두 번 째 사람은 성격이 조용하고 온순하고 내성적이거나  전라도 사람으로서의 뼈저린 차별을 받아본 분들입니다. 이런 분은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사실이 특 A급 비밀이기 때문에 아주 믿을 만한 사이가 아니면 함부로 발설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전라도가 고향이라는 특 A급 비밀을 털어놓았던 전도사님도 성격이 조용하고 내성적인 분입니다.

비호남인 전도사님들은 그 자리에 호남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고 호남인들을 비판했겠지요.
비호남인 전도사님들이 호남인들을 비판하는 자리에서 저는 그 중 아무 말없이 듣고 있는 전도사님이 호남인인 것을 알기에 얼굴 표정을 살펴보았더니 얼굴이 울그락 푸르락 했습니다.

지금같으면 단호히 나서서 호남인을 비판하는 것을 막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용기가 없어서 그냥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 전도사님처럼 서울말을 사용하며 고향이 호남인 것을 감추고 있는 호남인들은 비호남인들이 호남인을 비판하고 욕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비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을 비판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비호남인들이 호남인들을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면 거의 같습니다.
<호남인들은 간사하다.> <호남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 <호남인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호남인들은 끝이 안좋다>는 것입니다.

‘간사한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겉과 속이 다른 사람’ ‘끝이 안좋은 사람’은 선한 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그렇습니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까?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까? 안무서운 사람입니까? 예,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기꾼기질이 있는 사람입니까? 진실한 사람입니까? 사기꾼 기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앞에서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하고 돌아서서는 뒷통수 때릴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뒷통수 때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 닮은 사람입니까? 거짓의 아비 사탄을 닮은 사람입니까? 거짓의 아비 사탄을 닮은 사람입니다. 호남사람들 악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고 무서운 사람이고 사기꾼 기질이 있는 사람이고 돌아서서 뒷통수 때릴 사람이고 거짓의 아비 사탄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비호남인들은 호남 사람과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세요.

저희 집안에도 악한 사람 나쁜 사람 무서운 사람 사기꾼 기질이 있는 사람 돌아서서 뒷통수 때릴 사람, 거짓의 아비 사탄을 닮은 사람이 세 사람이나 있습니다. 제 아내가 순천사람이고, 두 딸이 완도 망석리에서 태어난 호남 사람입니다. 

저는 제 집에서 살고 있는 무서운 사람에게 뒷통수 맞기 전에 하루 속히 아내와 이혼을 하고, 두 딸을 고아원으로 보내버려야 하겠습니다.
간사하고 끝이 안좋고 믿을 수 없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과 한 집에서 살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저는 또 무시무시한 양떼를 거느리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같은 무서운 호남인들을 성도로 섬기고 있습니다. 양의 탈을 쓴 무서운 이리같은 교인들에게 물려서 죽기 전에 속히 호남땅 완도 망석리를 떠나야 겠습니다.

간사한 사람들, 믿을 수 없는 사람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 끝이 안좋은 사람들, 사기꾼 같은 인간들, 거짓의 아비 사탄을 닮은 인간인 호남인을 아내로 딸로 데리고 살고 성도로 모시고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그들에게 속고 물리고 뒷통수를 얻어맞기 전에 어서 그들과 결별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비호남인들이 ‘호남사람들은 간사한 사람 나쁜 사람 못믿을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호남인들 중에 가난한 하층민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호남인들은 왕권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상류층에 올라갈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특히 경상도 정권 30여년 동안 호남지역은 개발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완도 망석리 지역도 읍 소재지에서 자동차로 2 - 3 분 거리밖에 안되는 마을이지만 제가 처음 왔을 때는 상수도도 들어오지 않아서 3년간 우물물을 퍼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인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과 부산으로 많이 이동했습니다. 

서울로 이동한 호남인들은 달동네에 살면서 막노동, 노점상, 미화원(구두닦이), 버스차장(버스 안내양), 환경미화원(청소부), 가정부, 파출부, 식당아줌마,  포장마차, 공장직공등으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직장을 얻지 못한 젊은이들은 조직폭력배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호남인들이 권력에서 소외되다보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라디오나 TV에서 호남인들을 비하하게 되었습니다. 라디오나 TV에서 막노동, 노점상, 식모(가정부), 파출부, 미화원, 환경미화원, 죄수, 바보, 조직폭력배의 역할을 도맡아 하는 사람은 호남사투리를 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수 바보 하인 깡패 등 천하고 이미지가 나쁜 악역들이 호남 사투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다보니 호남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이고 나쁜 이미지가 심어졌습니다.

그래서 ‘호남사람’ 하면 죄수 깡패 도둑놈 조폭 인신매매범 바보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게 됩니다. 
고려시대 훈요십조나 이중환의 택리지의 호남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다 영남정권시대의 라디오 TV 방송의 호남인들의 바보 코메디역 식모역 깡패역 조폭역 하층민 역의 이미지가 겹쳐져서 <호남인들은 못믿을 사람들이다> <호남인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 <호남인들은 간사하다.>라는 이미지가 다른 지역사람들에게 뿌리 깊이 심어지게 되었습니다.

<호남인들은 간사하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려시대부터 형성된 호남인 기피현상으로 호남인들이 권력에 오르거나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워서, 한 번 얻은 권력의 자리나 한 번 들어간 직장에서 충성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 큰 기업 취직의 기회가 호남인들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고, 호남인이 경영하는 기업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호남인들은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였습니다. 그래서 한 번 들어간 직장에서 퇴출당하면 다음 직장 구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열배 스무배 직장 사장과 상사에게 잘 보이고 충성해야 합니다.

고려시대 이후 호남사람들은 농민 낮은 계층의 사람, 식모, 가정부, 파출부, 환경미화원(청소를 잘하시는 전문가), 미화원(구두를 잘 닦으시는 전문가), 종업원, 식당 시다, 아라이, 찬모 등 주로 낮은 계층 사람들이었고, 사용자가 아니라 피고용인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래사람들, 피고용인들, 막노동자들, 가난한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 사용주들, 부자들에게 잘 보여야 입에 풀칠이라도 합니다. 피고용인들이 사용주들에게 반항만 하고 데모만 하다가는 당장 쫓겨나서 입에 풀칠도 하기 힘듭니다. 그러다 보니 사용주들에게 고분고분하고 사용주의 편에 서서 충성하는 사람들은 간사하게 보인 것입니다. 자기 혼자 몸이면 일하다가도 마음에 안들고 구박받으면 “에이!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라며 직장을 박차고 뛰쳐나오면 그만입니다. 

운동권학생들이 부모의 녹을 먹고 살던 대학시절에는 데모도 하고 감옥도 가지만, 결혼만 하면 어용이 되어버리거나 보수주의자가 되어서 제도권에 편입하는 이유는 처자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들에게 고용당하여 일하고 있는 낮은 계층의 호남인들이 사장들에게 항의하고 데모만 하고 직장을 뛰쳐나오면 처자식 밥을 굶기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사장의 명령에 순종하고 직장에 충성합니다. 이것이 간사하게 보입니다. 

비호남인들에게는 직장의 문이 많이 열려 있어서 때로는 사장에게 반항도 하고 데모를 해도 옮겨갈 직장이 많은데, 호남인들이 경영하는 회사는 적기 때문에 호남인들은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한 번 쫓겨나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다른 직장 구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다른 지역사람들보다 직장의 사장이나 상사에게 열 배나 더 잘보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지역사람들의 눈에는 ‘아부, 아첨’하는 것 같고 간사한 간신배같이 보였습니다.

이처럼 비호남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호남인들은 간사하다라거나 믿을 수 없다거나 끝이 안좋다는 등의 지역성향을 평가합니다.

저는 각 지역사람마다 성향이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기도 사람, 경상도 사람, 충청도 사람,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평안도 사람이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분명히 지역마다 독특한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독특한 성향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크나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각 지역마다 독특한 성향이 있는데, 그 독특한 성향을 어느 지역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어느 지역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흉악하고 무서운 강력범죄를 저지른 살인범, 가정파괴범, 고등사기꾼, 인신매매범 등 에 대해서는 그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성실하고 선량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성향의 굴레를 덮어씌워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비판하고 욕하고 헐뜯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얼마나 큰 죄악인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낙도사역자를 자원하여 전라도에서 사역하다보니 전라도에서 태어나게된 두 딸이 평생 호남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이 기피의 대상이 되거나 차별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울화통이 터집니다. 

제가 목숨처럼 끔찍히 사랑하는 두 딸이 단지 호남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고 기피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하니 정말 통분을 느낍니다.

여섯 살 네 살인 제 두 딸은 자기들이 태어난 곳이 호남이라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전라도가 뭔지 경상도가 뭔지 모릅니다.

“어짜까 난몰라” “어째야 쓰까 어째야 쓰까” “하는디디디” "552에 머띠기 거띠기(집 전화번호를 몰라서)"라는 완도 시골 망석리 할머니들이 쓰는 전라도 토종 사투리를 쓰면서도 자기들이 전라고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여섯 살먹은 딸은 “아빠는 대구할머니 말을 닮았고 엄마는 순천외할머니 말을 닮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것이 경상도 사투리인지 전라도 사투리인지 모릅니다. “아빠 사투리가 뭐야?”라고 묻을 정도로 어립니다. 

이처럼 자기가 태어난 곳이 호남이고 자기가 쓰는 말이 완도 망석리 할머니들이 쓰는 토종 전라도 사투리인 줄도 모르고 사투리를 쓰는 어린 두 딸이 앞으로 호남땅에서 태어난 호남사람이라는 이유로 “간사하다”느니 “끝이 안좋다”느니 “겉과 속이 다르다”느니 하는 굴레를 덮어 씌워서, 비호남인들의 왕따의 대상,기피의 대상이 되고 차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정말 땅을 치고 통탄할 일입니다. 

저의 두 딸 뿐 아니라 모든 호남인들이 마찬가지입니다. 제 주위의 어떤 젊은 목사님 두 분은 부모님이 북한출신입니다. 부모님은 이북사람이지만 자녀들은 전라도 지역에서 태어나서 전라도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들뿐 아니라 모든 전라도 사람들은 어린 아기 때 자기가 태어난 곳이 호남땅인 줄도 모르고 컸던 사람들이 호남사람들입니다. 경상도인 김해김씨의 후손들도 있고, 경주 이씨의 후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경상도 조상들의 후손이지만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전라도 사람이 된 것입니다. 모든 전라도 사람들은 조상이나 부모님이 호남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호남에서 태어났을 뿐입니다. 아기 때에 자기가 쓰는 말이 호남사투리 인줄 모르고 호남 사투리를 썼던 사람들이 호남사람들입니다. 태어나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호남말을 쓰기에 따라서 썼던 것 뿐입니다. 

그러한 호남사람들에게 간사한 사람 못믿을 사람 끝이 안좋은 사람 등등의  굴레를 덮어씌워서 욕하고 판단하는 것은 도저히 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무서운 죄악입니다.

이것은 수천년동안 우리 민족을 지배해 온 사탄의 강력한 집단 최면이며,  대중조작입니다.
사탄은 히틀러를 통해서 아리안족 우월주의, 독일민족 우월주의로 독일 국민들을 대중조작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국민들은 자기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우수한 민족으로 믿게 되었고, 다른 민족들을 열등시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지배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히틀러를 통해서 아리안 족 우월주의를 고취시켰던 사탄은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 후 모든 권력자들을 통해서 ‘호남인 열등주의’을 고취시켰습니다. ‘호남인 열등주의’는 곧 ‘비호남인 우월주의’입니다. 

비호남인들은 호남인 열등주의를 통해서 자기들의 우월주의를 스스로 고취시킵니다. 이것은 비호남인들에 대한 사탄의 강력한 대중조작이며 대중 최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수천년동안 비호남인과 호남인을 분열시키고 분쟁시켜온 ‘호남인 열등주의’ ‘비호남인 우월주의’라는 사탄의 악독한 대중조작과 영적인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요즘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 저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은사였고 지금은 미국 풀러신학교 교수인 김세윤 박사님 등 몇몇 신학자들은 비판을 하지만 내용 중에 일리가 있는 부분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민족 전체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 민족 대대로 내려온 저주인 ‘호남인 열등주의’ ‘비호남인 우월주의’의 저주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단호히 끊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외에는 이 무서운 민족분열의 저주를 끊을 방법이 없습니다. 수천년간 우리 민족을 분열시키고 싸우게 하고 서로 원수지게 한 ‘호남인 열등주의’ ‘비호남인 우월주의’라는 사탄의 대중조작에 단호히 맞서서 영적인 전쟁을 벌여야 합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목사님 두 분은 홍모 목사님과 이모 목사님입니다. 이분들은 성자같은 목사님들입니다. 이 호남의 성자 목사님들이 사용하는 전라도 사투리만 듣고 그분들이 전라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좋지않는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고, 비호남인  조폭깡패가 쓰는 경상도나 충청도 사투리만 듣고 순박하고 좋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하는 이 엄청난 모순은 사라져야 합니다.

저는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호남인들의 한이 풀릴 줄 알고 김대중후보를 찍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완도 망석리의 초라한 작은 집에서  작은 우물물을 퍼마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호남소외의 진수를 체험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가 되면 상수도가 들어올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호남인들의 한을 풀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21세기를 눈 앞에 둔 우주과학시대에 우물물을 퍼먹고 사는 동네사람들이 너무 불쌍했고, 나 자신도 우물물이 마를까봐 노이로제에 걸리다시피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후보에게 한표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통해서는 절대로 호남인들의 한을 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히려 김대중 대통령을 미워하는 비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을 더 미워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햇볕정책을 반대하는 비호남인 보수주의자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저주에 가까울 정도로 극도로 혐오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을 반대하고 미워하는 전라도 사람들은 경상도 대통령들 때문에 오히려 경상도 사람들을 더 미워하게 됩니다. 역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반대하고 미워하는 비호남 사람들은  전라도 대통령 때문에 호남인들을 더 미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아하!  정치를 통해서는 영원히 호남인들의 한을 풀 수 없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호남인들의 한을 풀어주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이 지역감정죄를 회개하는 길 밖에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모든 비호남지역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지역감정을 회개하고 호남인들을 사랑하기로 각오한다면 호남인들의 한은 많이 풀어질 것입니다. 저는 비호남 기독교인과 호남인들이 하나가 되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이 일에 헌신하기로 했습니다.

다시 호남인들의 성향과 성격에 대해서 논해봅시다.

어느 사람에게 단점이 있다고 합시다.

그 단점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옳습니까?

첫째로 누구에게나 부정적인 단점이 있다면 반드시 긍정적인 장점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단점이 있다면 장점도 반드시 있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에게 단점으로 보이는 점도 다른 측면에서 해석하면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단점도 뒤집으면 장점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성격이 급한 단점을 지닌 사람은 그것을 뒤집어 보면 추진력이 강하다는  장점이기도 합니다.

성격이 느린 단점을 지닌 사람은 그것을 뒤집어서 보면 신중하고 꼼꼼하게 일을 철저히 해서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장점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저를 볼 때 장점은 보지 않고 단점만 보고 비판한다거나 단점을 뒤집어서 장점으로 보지 않고 단점으로만 본다면 그것이 옳은 처사입니까?

저는 저를 볼 때 단점만 보고 장점은 전혀 보지 않거나 단점을 뒤집어서 보고 장점으로 해석해 주지 않고 오직 단점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과 가까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단점은 눈감아주고 장점만 볼려고 애쓰는 분이나, 저의 단점을 뒤집어서 장점으로 해석해 줄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저는 평생의 친구로 삼고 존경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좋은 점은 외면하거나, 단점을 뒤집에서 장점을 해석해주지 못하는 사람은 마음이 완전히 비뚤어진 사람이며 교만의 극치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을 보든지 단점만 찍어내어서 콕콕 쪼아댑니다. 장점은 보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언가 자신에게 깊은 상처가 있고 열등감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장점은 보지 못하고, 단점만 보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깊은 상처와 열등감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치유를 받고 새사람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비난하지 않고, 이해하고 너그럽게 용납하고 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단점도 뒤집어서 장점으로 해석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자신의 과거의 모든 마음의 상처와 열등감을 못박고 치유받은 천국의 국민들입니다. 천국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아직도 마음의 상처와 열등감을 치유받지 못한 비기독교인들과 같이 다른 사람의 단점만 보고 그 단점을 헐뜯고 비난한다면 주님의 십자가의 피흘리신 고통을 무위로 돌리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대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해야 합니다.

전라도 사람들의 지역성에는 분명히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서울 사람, 경기도 사람, 강원도 사람, 평안도 사람, 경상도 사람, 충청도 사람, 제주도 사람, 함경도 사람들의 지역성에는 단점이 없습니까? 단점이 없는 지역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지역사람들에게는 장점도 있습니다.

서울사람 경기도 사람 강원도 사람 경상도 사람 충청도 사람 제주도 사람 이북사람에게도 장점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러면 전라도 사람들에게는 장점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느 지역사람이건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모든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은 어느 지역사람이건 간에 그 지역사람들의 장점을 볼려고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사람들의 단점까지도 뒤집어서 장점으로 해석할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서 2장 3절 말씀을 통해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낫게 여긴다’는 말씀은 ‘낮게 여긴다.’라는 의미가 아니고,  ‘훌륭한 사람으로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지역주민들을 나보다 훌륭한 사람으로 여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그리스도인들은 전라도 사람들을 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전라도 그리스도인들은 경상도 강원도 제주도 서울 사람들을 나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전라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보다 더 훌륭한 점 한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라도의 기독교 복음화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전라도 사람들이 전국의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겸손하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큰 교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많은 전라도에 겸손한 사람이 가장 많다는 의미입니다. 겸손은 인간이 가진 미덕 중에 가장 위대한 미덕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가장 많은 지역이 가장 겸손한 사람이 많은 지역이며 영적으로 볼 때 가장 선한 지역, 가장  아름다운 지역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버리고 겸손한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호남인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 한국에서 가장 겸손하고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호남인들은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지역사람들을 사랑하시지만 특히 호남지역사람들을 가장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선하고 아름답고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저의 아버님과 어머님의 고향이며 저의 뿌리인 경상도를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저를 있게한 고향 경상도 사람들을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며 저의 일심동체인 제 아내와 저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두 딸의 고향인 전라도 역시 생명처럼 사랑합니다. 제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저울로 달아보면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고 똑같을 것입니다.

비호남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평생동안 호남인들의 단점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고 나보다 낫게 여기겠다는 약속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서원이나 서약이나 맹세를 시키지는 않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원이나 서약이나 맹세는 어기면 하나님께 무서운 벌을 받거나 사랑의 매를 맞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약하여 부지불식간에 어길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서원하거나 서약하거나 맹세하기보다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약속하는 것은 부지불식간에 어겨도 후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개선하면 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비호남인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천국에 올라갈 때까지 평생동안 호남인들을 비판하는 말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하거나 서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약속하는 것입니다. 아니 자기 자신에게 약속하는 것입니다.

비호남인 그리스도인 중에 앞으로 천국에 갈 때까지 평생동안 나는 호남인들을 뒤에서 비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오른손을 드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따라하기 바랍니다.

<나는 앞으로 평생동안 호남인들을 비판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혹시 나도 모르게 호남인들을 비판하는 말을 했다면 즉시 하나님께 회개하고 개선하겠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한다는 의미는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비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를 회개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호남인들 중 개인의 죄와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죄를 짓거나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해석하고 비판해야지 절대로 호남인이라는 것을 개입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어느 호남인이 죄를 짓고 잘못을 저지를 때,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타고난 죄인으로서 죄와 잘못을 저지를 때 사랑의 비판을 하거나 사랑의 책망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 호남인이라는 것을 개입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합니다.

전라도 배우자와 사는 비호남인 배우자들은 부부싸움을 할 때, 비호남인 배우자가 호남인 배우자에게 "전라도사람이니까 어떻다'라는 등의 부정적인 말을 한다고 합니다.
 
저는 결혼 후 처음에는 부부싸움을 좀 했지만 지금은 거의 부부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할 때에도 아내가 호남인이라는 것을 개입시킨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부부싸움에도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저를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저와 생활해 본 일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 제 3 자의 부정적인 이야기만 듣고 저를 만날 때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이상현 목사는 좋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고 괴롭고 슬프겠습니까? 지금 호남인들이 그런 형국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호남인에 대한 모든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선입관을 버리는 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되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그 자체가 ‘판단죄’ ‘교만죄’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사투리의 기원.

전라도 사투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사투리의 기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는데 학과목 중에 언어학도 배웁니다. 언어학 중에 사투리에 대해서 배우는 방언학이 있습니다. 국문학과에서 배우는 방언학은 사도행전의 은사인 방언과는 다릅니다. 사투리를 방언이라고 합니다. 

방언학에는 지리 방언학, 구조방언학, 생성방언학, 사회방언학, 대조방언학 등이 있습니다.
언어는 지리적 요인과 사회적 요인에 의하여 분화되어 있어 전자를 지역방언(regional dialect)이라 하고 후자를 사회방언(social dialect)이라 부릅니다. 

방언학에서는 사투리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방언학에서는 사투리의 기원을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에서 사투리의 기원을 찾습니다. 성경 창세기 11장을 보면 사투리의 근원은 바벨탑 시대로 올라갑니다.

바벨탑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시날평지에 높디높은 탑을 세웠습니다. 탑을 쌓은 이유는 하늘높이 쌓아서 자신들의 능력을 나타내어 명성을 드러내고 하나님에게 도전할 목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인간들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보다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서 탑을 쌓고 있는 인간들의 교만한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여러 언어로 갈라버렸습니다. 지구상에는 수천가지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 수천개의 언어는 바벨탑을 쌓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었습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탑을 쌓는 일도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 하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쓰는 말을 알아듣고 반가와서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끼리 점점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일반언어학에서는 한국어를 우랄 알타이계라고 분류하는데, 그것은 진화론적인 분류입니다. 한국어를 비롯한 여러 언어가 원래는 하나였는데 점진적으로 분화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의 바벨탑 사건을 보면 처음부터 한국어 따로 일본어 따로 중국어 따로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럽에도 영어 따로 스페인어 따로 독일어 따로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벨탑에서 갑자기 수천개의 언어가 생겼는데, 서로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의 집단과 지역분쟁을 하기도 하고 전쟁을 하기도 하여 패배한 언어사용자들은 멀리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쟁이 아니더라고 유목을 하는 유목민이 되어 푸른 초장 맑은 시냇물을 찾아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한국어 사용자 집단’을 이루어 동쪽으로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없었으니 ‘한국말’이 아니지요. 그냥 ‘우리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어’라는 말은 ‘대한제국’시대 이 후의 용어입니다. 북한에서는 조선어라고 합니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조선말’이라고 합니다.

한국말와 조선말은 같은 말인데 부르는 이름이 다릅니다. 바벨탑이 중단된 이후 새로 생긴 수천개의 언어 중에 아무튼 지금 우리가 ‘한국어’나 ‘조선어’라고 이름붙인 ‘우리 말’을 쓰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바로 만주지역과 한반도입니다.

그런데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다 똑같은 말을 쓴 것이 아닙니다. 같은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 중에도 말씨와 말버릇이 조금씩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옛날에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이 중원과 만주지역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원과 만주지역에 살던 한국말을 쓰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말투가 “하니껴?” “했니더”라는 독특한 말버릇이 있는 사람이 만주를 떠나서 경상도의 안동 지역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의성과 안동지방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했니껴?” “했니더”라는 말버릇을 지닌 사람이 자녀를 낳았는데 자녀들은 다른 말을 배울 기회가 없으므로 아버지의 말버릇을 그대로 배우게 되어 안동 의성사투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중에 어떤 후손은 “했어예” “하는 기라예” “하능교?”라고 말하는 버릇을 지녔는데 이 사람이 안동 의성을 떠나서 아래 지방으로 이사를 와서 대구 근처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대구 근처에서 자녀를 낳고 후손이 퍼지니 자녀나 후손들은 조상의 말버릇대로 배워서 사용하게 됩니다. 

필자는 의성, 문경, 약목, 대구에 살아봐서 각 지역의 사투리가 각기 다른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중원과 만주에 정착했던 ‘우리 말’을 사용하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나는’이라는 말을 항상 ‘내는’이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렇다고 하니 그렇다고 하니 그러네’라는 말을 ‘굴타쿠이 굴타쿠이 쿠네’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니 아니라고 하네’라는 말을 ‘굴타쿠이 쿠이 아이라쿠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장 자주 쓰는 말버릇은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은 말을 할 때 마다 “사실, 사실” “했다 아이가”라고 합니다. ‘사실’ ‘했다 아이가’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고향을 떠나 돈을 벌겠다고 남쪽으로 이사를 갔던 바 그 사람은 경남 사람의 조상이 되었고 경남 사투리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중원과 만주에서 모여서 한국말을 쓰던 어떤 사람은 “하는디” “했어라우” “했당가?” “어째야 쓰까”“어짜까 난몰라” “잉?”라는 말버릇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또 그 사람은 ‘거시기 머시기’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사실 ‘거시기 머시기’는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 ‘표준말’로 분류됩니다. 서울사람들도 ‘거시기 머시기’라는 표준말을 사용합니다. 다만 전라도 사람들은 ‘거시기 머시기’라는 말을 유독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전라도 사투리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또 그사람의 말버릇 중에 “참말로”라는 말을 아주 자주 사용합니다. 

경남 땅에 정착한 사람이 “사실”이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사용해서 그 말습관이 후손들에게 다 퍼져버린 것처럼  “참말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은 만주에서 한반도 서쪽으로 이동해서 남쪽으로 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자녀를 낳았는데 그 당시에는 그들 가족외에는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 자녀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을 기회가 없어서 아버지가 하는 “참말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손들이 자연히 그 조상과 같은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 여섯 살 먹은 딸네미와 네 살 먹은 딸네미도 “하는디” “참말로” “어짜까 난몰라” “어째야쓰까”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전라도 사투리건 경상도 사투리건 영어건 간에 다 바벨탑을 쌓았던 인류의 조상들의 반역죄 교만죄 인본주의의 결과이므로 우월감을 내세우거나 열등감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모든 언어와 모든 사투리가 죄의 결과이므로 자신들의 언어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죄스럽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한 편 그리스도인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거듭난 의인들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행위적 죄인이며 신분적 의인입니다.(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신분적 의인이며 행위적 의인이므로 그리스도인이 짓는 죄는 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구원파는 이단 중의 이단입니다. 통일교보다 나쁜 이단입니다. 옛날 이단들은 이름을 다르게 하고 나왔지만 요즘 이단들은 대한 예수교 침례회(박옥수), 대한 예수교 감리회(정명석) 등 정통교단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나타납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들은 행위적 죄인들이지만 신분적 의인이 되었으므로 언어에 있어서도 ‘바벨탑의 반역죄 교만죄 인본주의죄’가 완전히 씻음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미 신분적 지옥의 백성, 사탄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천국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 모든 사투리는 이미 천국인의 언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과 언어와 사투리는 이미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성결하고 거룩하게 된 거룩하고 성결한 천국인의 입이며 천국인의 언어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언어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거나 우월감을 느껴서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바벨탑으로 저주받은 우리의 말, 우리의 사투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거룩한 천국어로 거듭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한국말을 사용하고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이 천국인인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언어관, 올바른 방언관입니다.

다른 언어나 다른 사투리와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자기의 공로로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악하고 교만한 죄악입니다.

그리고 다른 언어나 다른 사투리와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바벨탑의 죄악된 언어를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공로를 무위로 돌리고 짓밟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거듭나서 천국인이 된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어떤 언어이든간에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고 가장 아름답게 보시는 천국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투리에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향비교의 원리로 열등감을 극복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투리를 사용하여서라도 마음껏 말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투리를 사용해서라도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 아십니까?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언어장애자인 농아인입니다. 농아인들이 보기에는 사투리에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열등감은 하나의 사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농아인들의 아픔과 고통에 공감하면서, 비록 사투리일지라도 마음껏 말을 할 수 있다는 자체에 대해서 입과 목청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마가복음 7장 19절에세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우리를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바꾸어도 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 중에 어느 언어냐 어느 사투리냐가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용의 말이 나오느냐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도 하고 더럽게 하기도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영어나 한국의 표준말인 듣기좋은 서울말을 사용하면서도 그 내용이 욕설이나 음담패설이나  중상모략이나 악담이나 상처를 주는 말이나 저주나 비판이나 폭력적인 말이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이나 타인을 경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이 나온다면 그것은 더럽디 더러운 말입니다.

그러나 사투리를 쓰더라도 그 말의 내용이 선한 천국어이면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말입니다.
천국어란 무엇입니까?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이러한 말이 천국어입니다.
그리고 격려와 위로를 주는 말,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 꿈과 비전을 주는 말, 새로운 길을 보여주는 말, 친절한 말, 기쁨을 주는 말 등이 천국어 입니다.

또한 “그럴 수도 있지.” “다 피치못할 이유가 있을거야.”“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뭐” “자라온 환경과 조건을 이해해야 돼” “그 사람도 앞으로 성화될 날이 올거야” “그 사람도 점점 성화되겠지”“나 때문이야.” “내 탓이야” 
이처럼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말이 다 천국어입니다.
  
무슨 억양의 언어를 쓰느냐 무슨 사투리를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어떤 형태의 언어를 사용하든간에 어떤 내용의 말을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자>라는 말을 가장 강조합니다.
의사 중에도 의사다운 의사가 있습니다. 말에 품위가 있고 옷차림에도 품위가 있고, 언어에도 품위가 있고 신뢰가 가는 의사가 의사 다운 의사입니다. 그런데 어떤 의사는 의사다운 품위가 없습니다. 의사인 것을 모르다가 누가 의사라고 소개하면 ‘저런 사람이 의사였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의사도 있습니다.

변호사 중에도 변호사 다운 변호사가 있습니다. 언어나 행동이나 옷차림 등에 품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변호사는 전혀 변호사답지 않습니다.

목사 중에도 목사다운 목사가 있습니다. 언어나 행동이나 외형에 있어서 목사의 분위기가 풍기는 목사가 있습니다. 목사인 줄 몰랐다가 ‘목사’라고 소개하면 “어쩐지 목사님 같더라.”라는 말을 듣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말이나 행동이나 분위기가 전혀 목사답지 않아서 누가 “이 분 목사님입니다.”라고 소개하면 소개받기 전에 그 목사가 했던 말이나 행동이나 옷차림이 전혀 목사의 분위기가 풍기지 않아서 마음 속으로 ‘저런 사람이 목사였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자>라고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그리스도인입니까?

언어가 부드러우면서도 위엄이 있고 품위가 있고 행동이 겸손하면서도 법접할 수 없는 위엄과 품위가 있고, 이기적이지 않고 남을 배려할 줄 알고 양보할 줄 알고 친절하며 가진 것을 나눌 줄 알고 베풀줄 아는 사랑의 실천자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 다운 그리스도인은 어떤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든간에 어떤 사투리를 사용하던 간에 말의 내용이 친절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위엄과 품위가 있습니다. 그리고 타인을 배려하고 양보하고 도움을 주고 친절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투리를 사용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말을 합시다. 그리스도인다운 행동을 합시다.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합시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은 열등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감사함으로써 마음에 평안과 만족과 잔잔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전라도 선교사 이야기.

'호남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유화례선교사님'은 미국인 여자 선교사입니다. 이분은 20대의 꽃다운 처녀로서 한국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천국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국인 미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우리나라에 와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우한 한국인들을 위해 결혼도 하지않고 처녀로서 일생을 바치며 살았습니다.

6.25전쟁 때도 수피아여고의 제자들과 그녀가 돌보던 불우한 사람들을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피난갈 수 없다며 광주에서 떠나지 않고 온갖 고통을 겪었습니다.

유화례선교사의 후계자인 '서서평선교사님'이라는 분은 '제 2의 호남의 성자'라고 불리워집니다. 이분도 미국인으로서 처녀의 몸으로 한국에 와서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한국의 불우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재직했던 수피아여고생들과 그 분이 따뜻한 사랑으로 도와주고 돌보아주었던 수많은 한센씨병자(나환자)들이 "어머니,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세상을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라며 대성통곡했다고 합니다.

가족에게도 버림받고 공동묘지나 깊은 산속을 헤매며 살아야 했던 나환자들을 돌봐주고 그들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고 사랑으로 감싸주었던 그녀를 그들은 항상 어머니라고 부르며 존경했습니다. 유화례선교사님과 서서평선교사님은 이름까지 한국식이름으로 바꾸며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호남의 성자라고 불리웠던 유화례 선교사님과 서서평 선교사님을 비롯한 수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전라도에 와서 선교사역을 했습니다. 그들은 전라도 사투리를 쓰면서 전라도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이 고국의 사랑하는 부모형제들을 뒤에 두고 극동의 작은 반도나라의 전라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 일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전라도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비호남인 중에는 인종이 같고 언어가 같은 한민족을 자처하면서도 같은 민족인 전라도 사람들을 싫어하고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미국인 선교사님들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호남인들에 대해서 거부감이 생기고 기피하려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피부 다르고 언어다른 미국인 선교사들 중에 전라도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일생을 바치고 전라도 땅에 묻힌 유화례 서서평 선교사님을 비롯한 많은 미국인 선교사님들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역감정죄를 회개합시다.

 마지막으로 지역감정은 단순한 중립적 감정이 아니라 성경에 비추어 볼 때 명백한 죄악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로마서 1장  29 - 32 절과 십계명과 산상수훈을 근거로 지역감정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에게 짓는 죄도 하나님께 짓는 죄악이므로 하나님께 회개해야 할 죄입니다.

사무엘하 12장 9절과 10절에 보면 다윗이 밧세바와 우리아에게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다.’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며 하나님께 지은 죄라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겼다’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을 모독했다.’ ‘하나님을 배신했다.’ ‘하나님을 개처럼 여겼다.’‘하나님을 반역했다’는 의미입니다. 12장 10절부터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안에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리십니다. 

다윗이 사람에게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 자신을 업신여긴 죄로 간주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역감정죄는 사람에게 짓는 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비호남사람들이 호남인들을 멸시하고 차별하고 기피하는 것은 호남인들에게만 짓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악입니다.
영남사람들이 호남사람들을 멸시하고 미워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악입니다. 
호남사람들이 영남사람들을 미워하고 비난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악입니다. 

먼저 비호남인들이 호남인들을 차별하고 기피하는 죄가 무슨 죄인지 살펴봅시다.
교만(멸시 천대), 살인(미움 요일서 3: 15 - 18), 후욕, 비난, 무정, 무자비, 수근수근, 자랑(자기 지역에 대한 긍지를 넘어선 배타적 자랑의 마음 요일서 2:16),원수맺음(광의의 원수맺음 행위), 당을 짓는 행위, 분쟁, 싸움(선거전쟁),불신앙(요일서1:9 - 11)

다음으로 호남인들이 영남인들을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이 무슨 죄인지 살펴봅시다. 호남인들은 영남인들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영남인들을 미워하고 비난해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억압하고 착취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일본인들의 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가해자가 아니고 피해자입니다. 자기의 목숨을 빼앗아 가려고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은 가해자이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피해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은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돌로 친 가해자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손동인 손동신 학생은 자기를 잡아서 총살시키려는 좌익공산주의자 학생들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두 아들을 총살시킨 좌익학생 안재선 군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양자로 삼아서 믿음으로 양육하고 교육시켰습니다. 
예수님, 스데반 집사님, 손동인, 손동신, 손양원 목사님, 그리고 순교하면서 자기를 죽인 원수들을 용서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수많은 순교자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들입니다.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가해자들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용서를 빌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 피해자들은 그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일본의 의식있는 목사님들은 종종 한국에 와서 과거에 일본인들에게 피해를 입은 한국인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일본인 목사님 자신들이 한국인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선조들이나 선배들이 한국인에게 피해를 끼쳤지만, 그 목사님들이 선조들이나 선배들을 대신해서 한국인들에게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저도 경상도 출신 목사로서 경상도 정권자들이 30년간 호남사람들을 푸대접하고 차별한 것에 대해서 엎드려서 용서를 구합니다. 

한국인들은 과거에 우리 조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아서 우리 선조들을 노예화하고 징병에 끌고가서 수많은 선조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우리 조국의 여성들을 정신대로 끌고가서 창녀처럼 비참한 신세로 만들었습니다.

일본인들의 죄악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고 주먹이 부르르 떨릴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일본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저의 동기 중에도 일본인들에게 선교를 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나간 분이 두 명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가해자이고 우리 한국인들은 피해자이지만 일본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호남인들이 영남인들의 피해자이지만 호남의 그리스도인들은 영남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복음화율이 호남지역보다 훨씬 적은 영남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호남인들이 영남인들에 대해 짓는 죄는 다음과 같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 살인(미움), 비난(영남인 등), 열등감, 자기비하, 자기 연민, 광의의 원수맺음, 당을 지음, 시기 질투(시샘),싸움(선거전쟁), 분쟁, 무정, 

이 시간에 영남인을 비롯한 비호남인들은 호남인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비난하고 멸시하고 차별한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호남인들에게 짓는 죄만이아니라 하나님께 짓는 죄이기에 회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호남인들은 영남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비난한 죄를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호남인들이 영남인에게 짓는 죄도 하나님께 짓는 죄입니다.
회개란 단순히 감정적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며 죄를 자백한 후에는 말과 행동이 바뀌어야 참 회개입니다. 삶이 변하는 것,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비호남인 그리스도인들은 호남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비난하고 헐뜯은 죄악을 하나님께 참회하는 기도를 드린 후에, 앞으로 천국에 갈 때까지 평생동안 호남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비난하거나 차별하지 않은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참회개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정도로 바뀌는 것은 반쪽 회개에 불과합니다. 

온전한 회개는 적극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인정하고 칭찬하고 장점을 말하고 사랑하고 포용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는 행동과 삶으로 바뀌는 것이 참회개입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전라도 사람들을 직원으로 고용하는 것을 기피하지 않는 경영인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도 절반의 회개에 불과합니다. 온전한 회개는 전라도 사람들을 기피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전라도 사람들을 인정하고 사랑하여서 전라도 사람들을 많이 채용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경영주들에게 재물얻을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상상 이상의 축복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호남인 그리스도인들이 영남인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비난한 것을 하나님께 회개기도를 한 후에는 영남인에 대해서 평생 부정적으로 말하거나 비난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 참회개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는 정도는 소극적인 회개입니다. 적극적으로 영남사람들을 인정하고 칭찬하고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참회개입니다.

서로가 지역감정죄를 회개하고 서로 비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서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풍토가 교회에서부터 조성될 때 이 나라의 망국적인 지역감정은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등록일 : 2003-12-31 [23:54] | 조회 : 122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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